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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의 수필] 책으로 배운 세계와 길에서 읽은 세계

[박상훈의 수필] 책으로 배운 세계와 길에서 읽은 세계
[박상훈의 수필] 책으로 배운 세계와 길에서 읽은 세계

글 | 박상훈


나는 오래전부터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조금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책을 펼치면 걱정이 잠시 뒤로 물러났다. 도서관의 책상 앞에서도 그랬고, 길을 걸으며 손에 든 책장을 넘길 때도 그랬다. 누군가는 걸어 다니며 책을 읽는 모습을 이상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책은 단순한 지식의 묶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로 열리는 창이었고, 동시에 세상 근심으로부터 잠시 빠져나갈 수 있는 작은 피난처였다.

책 속의 세계는 비교적 정돈되어 있었다. 문장은 앞뒤가 있었고, 목차는 방향을 알려주었고, 한 권의 책은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때 세상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충분히 읽고, 충분히 생각하면, 복잡한 현실도 언젠가는 문장처럼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 위의 세계는 책과 달랐다.

송산역 근처를 지나거나, 탑석역 쪽으로 걸어가거나, 민락2지구의 상가들을 지날 때마다 나는 책에서 보지 못한 표정들을 만난다. 병원에 들르기 위해 나선 날,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잠깐 나온 날에도 거리에는 늘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누군가는 급히 걷고, 누군가는 멈춰 서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본다. 그 장면들은 문장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부용천을 따라 걸을 때도 비슷하다. 물은 천천히 흐르지만 사람들의 하루는 그렇게 느리지만은 않다. 자전거가 지나가고, 산책하는 사람이 지나가고, 비닐봉지 하나가 바람에 밀려 움직인다. 그 사소한 장면 앞에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책은 세상을 설명해주지만, 길은 세상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책을 읽을 때 나는 걱정에서 벗어났다. 길을 걸을 때 나는 다시 걱정 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책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고, 길은 나에게 질문을 주었다. 책에서 배운 문장과 길에서 만난 침묵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내 글의 자리를 찾았다.

내가 쓰는 글은 대단한 결론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 위한 것이다. 도서관에서 얻은 문장, 부용천에서 본 표정, 역 근처에서 스쳐 간 사람들의 걸음. 그런 것들이 내 안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남는다.

세상은 책처럼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책을 읽은 사람은 길 위의 혼란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그 오래 바라보는 시간을 글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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